<육룡이 나르샤>의 메시지, 진짜 강한 자는 누구인가?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18회에서
삼한제일검(三韓第一劍)
길태미(박혁권)의 최후는 비극적(悲劇的)으로 그려졌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사극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캐릭터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악역(이 형용모순의 언어를 보라)이었던 길태미를 위한 ‘애정’이 깊이 묻어나는 장면이었다. 또, 길태미에 환호했던 시청자들을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육룡이 나르샤>의
김영현 작가는 새로운 삼한제일검으로 등극한 이방지(변요한)의 칼 앞에
죽음을 앞둔 길태미를 위해 소름끼치는 대사(臺詞)를 준비했는데, 그것은 곧 이
시대(비단 이 시대뿐이겠는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자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고민이었고,
<육룡이 나르샤>가 넘어서고자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약한 자들을 짓밟고 빼앗았다”


“그럼 약한 자를 짓밟지 강한 자를 짓밟냐. 약한 자한테서 빼앗지,
강한 자한테서 빼앗냐고. 세상이 생겨난 이래 약자는 언제나 강자한테 짓밟히는 거야.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약자는 강자한테 빼앗기는 거라구.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강자는 약자를 병탄(빼앗아 삼킨다)한다. 강자는 약자를 인탄(짓밟고 빼앗는다)한다.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숨이 턱하고 막혔다. 맞는 말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씁쓸하지만 역사(歷史)란 곧 지배층(계급)의 피지배계층(계급)에 대한 수탈(收奪)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자는 약자를 병탄(倂呑)하고, 강자는 약자를 인탄(燐彈)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 앞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어떤 해답을 제시할 것인가?

최후의 일격으로 길태미를 쓰러뜨린
이방지는 길태미에게 그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지. 이렇게” 항상 강자로 군림했던 길태미가 이번에는 약자가 되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 강한 자 앞에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덜 강한 자의 비애(悲哀)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과한 풀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방지가 말했던 ‘강자’란 그의 신분이 그렇듯 ‘백성’을 상징하고, ‘약자’를 스스로를 강자라고 여겨왔던(혹은 착각해왔던)
‘길태미를 위시한 도당 3인방’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강함과 약함이 갖고 있는 일차원적인 개념을 뒤집고,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 순간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김수영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진 <풀>은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널리 통용된다. 풀을 민초로, 바람을 억압세력으로 보는 민중주의적 관점 말이다.
시인 황규관은 “이 시에서 말하는 풀은 김수영의 시적 사유에서 꿈틀거리던 ‘민중’에 대한 탁월한 시적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 거기까지 다룰 생각은 없다.)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제 다시 질문해보자.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강함을 지닌 것은 누구인가? 감히 그것이 ‘민초’, 다시 말해 ‘민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육룡이 나르샤>가 굳이 이방지의 칼에 길태미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새로운 국면이 뭔데? 죄 없는 백성들이 죽는 거?”

“그건 견뎌내야 할 과정이지. 뭐든 대업엔 희생이 따르니까”


<육룡이 나르샤>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역사 드라마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기존의 역사 드라마가 소위 ‘영웅’으로 표현되는
지배계급
중심의 이야기를 써왔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 이성계, 이방원과 함께 민초인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육룡’에 포함시켜
역사적 인물에
못지 않게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실제 <용비어천가>에서
‘육룡’이
태조의 고조 할아버지인 목조부터 시작해서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에 이르는
여섯 대를 일컫는 것을 통렬히 비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방지, 무휼, 분이를 통해 민초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울 뿐만 아니라, 희망이 없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 민초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민초’들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운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종류가 있다. 영웅사관과 민중사관이 바로 그것인데, 영웅사관은 위대한 영웅들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하고 해석한다. 엘리트주의 역사관이라고도 한다. 특정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왔던
과거의 역사 드라마가 취해왔던 방식이기도 하다. 반면, 민중사관은 비록 역사에 기록되진 못했지만, 그래서 이름도 없이 사그라져야만
했던 이 땅의 수많은 민중들이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입장이다.
그런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드라마가 몇 년 전에 방영됐던 적이 있었다. 바로 2011년에 방송됐던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인데, 극중에서
세종(한석규)과 함께 강채윤(장혁)과 소이(신세경)이 한글을 창제하는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영웅사관에서 벗어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육룡이 나르샤>와 <뿌리깊은 나무>가 같은 작가(김영현)에 의해 집필됐다는 점인데,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는 누가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릿속을 스치는 왕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나열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스승님 말씀을 들어야 했다. 대국을 보라고. 정치하는 것들은 다 그렇다고. 그 잘 되어가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얼마나 죽어나가야 하냐. 그 망할 평정지계, 몇이나 더 죽어야 고려가 끝장나냐“며
분개하던
이방지를
기억하길 바란다.
역사 속에 특출났던 인물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들만으로 어찌 세상이 바뀔 수 있었겠는가? 그 잘 되어가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죽어가야만 했던 백성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왕조는 명맥이 끊어지고, 정권도 수명이 다한다. 하지만 ‘백성’은 지난 천 년을 견뎌왔고, 앞으로 천 년을 이겨낼 것이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진정한 강자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