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의 거대한 물음, ‘국가란 무엇인가?’

 



 

“장군, 나라 국자는 창으로 땅과 백성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이게 나라입니다. 이 나라 국에 이 글 자(집 가)를 더하면 땅과 백성을 창으로 지켜내어 가족을 이룬다. 이것이 국가입니다.” (정도전)

국가(國家)란 무엇인가? 사전을 뒤적여보기로 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일정한 영토를 보유하며, 거기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을 가진 집단.’ 허나 그러하기만 하면 된 것인가? 영토가 있고, 사람이 있고, 주권이 있으면 그만인가?이 무미건조한 풀이[解]에는 ‘바람[願]’이 없다. 다시 질문을 던지자.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작가로 전향(轉向)한 유시민은 자신의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이 바라는 국가를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라고 말한다. 그건 도대체 어떤 국가일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란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기존 역사 드라마가 제시했던 ‘바람직한 위정자의 모습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한낱(?) 드라마를 통해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 탓에 수업시간에서조차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 질문에 대해 사유(思惟)할 수 있게끔 해준 <육룡이 나르샤>는 참으로 고마운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50부작에 달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육룡이 나르샤>는 최영(전국환)과 이성계(천호진)이 전면으로 도약하는 2막을 맞이했다. 1막의 주인공들이었던 도당 3인방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짜임새 있는 스토리는 여전히 촘촘하기만 하다. 특히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최영과 이성계가 벌이는 설전(舌戰)과 태조 이성계를 가능하게 했던 ‘위화도 회군’을 재현한 장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그 가운데 ‘최영의 국가’와 ‘이성계의 국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목은 전율 그 자체였다. 우왕(禑王)과 정권을 장악한 최영은 명나라의 속국(屬國) 상태를 벗어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요동 정벌을 시도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화살로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이성계를 선택하고, 그에게 ‘요동 정벌’을 하명(下命)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통해 완강히 반대한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동북아에 찬란히 빛났던 고구려(高句麗)의 기상을 이어받아 그 이름을 고려(高麗)라 했던 국가의 운명은 ‘옛 영토 회복’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에서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여기에 딴지를 거는 이성계를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몰아세우는 역사적 관점도 존재했다. 4불가론의 첫째가 바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없다’는 이소역대(以小逆大숨)의 숨막히는 논리가 아닌가? 이성계의 입장은 패배주의인가, 아니면 현실주의인가. <육룡이 나르샤>는 그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백전백승이 아니냐’고 묻는 최영에게 이성계는 “백전백승을 하지 않았다”며 고통스럽게 대답한다. 비탄에 젖은 그는 요동의 한파에 보급이 끊겨서 어이없는 퇴각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4천의 군사가 굶어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전쟁에서 승리해 금의환향해야 할 상황에서 병사들의 어머니에게 수천 구의 시신을 안겨줬”다면서 “이것이 어떻게 승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며 울부짖는 이성계에게 ‘국가’란 무엇이었을까? 왕이 되라고 강력히 권유하는 정도전에게 거듭 사양하며 자신에겐 ‘가족’이 최우선이라고 했던 마다했던 것은 사실 그의 국가관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성계에게 국가란 ‘피붙이’ 죽, ‘가족의 확장판’이 아니었을까?

한편, 최영은 이성계에게 이성계에게 최영은 “대업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네. 요동 정벌에 희생될 병사들을 생각지 말고 우리가 요동을 정벌하고 살아나갈 더 많은 후손들을 생각하”라고 답한다. 무엇보다 ‘국가’ 그 자체가 우선이었던 전체주의적 관점에 서 있는 최영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이성계는 깨닫는다. “최영 장군의 마음엔 사심도 없지만 백성도 없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병사가 마음에 없다”

“정치에 뜻이 없고 능력이 없는 왕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것은 곧 최영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더구나 최영은 이인겸처럼 다른 세력의 이익을 따지지 않을 것이니 국정은 오로지 최영 장군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고려는 지난 십수년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권력자를 만났다. 탐욕이 없는 권력자, 백성의 삶보다 자신의 삶보다 나라가 최우선인 권력자. 하여 나라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위험한 권력자.” (정도전)

이는 정도전의 ‘경고’와도 맥이 닿는다. 일반적으로 권력자는 (어떤 것을 욕망하든 간에) 탐욕으로 가득차 있고, 그것은 곧 백성에 대한 (어떤 것을 빼앗든 간에) 수탈로 이어진다. 길태미가 죽음을 맞이하며 당연하듯 외쳤듯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영은 다르다. 그는 탐욕이 없다. 하지만 백성도 없다. 그에겐 무엇보다 나라(국가)가 우선이다. 정도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위험한 권력자.’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우리는 지난 몇 년의 기간동안 ‘탐욕’으로 가득찬 권력자도 겪어봤고, 그 무엇보다 ‘국가’를 내세우는 권력자도 만나봤다.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는 것인가, 국민이 있고 국민이 있는 것인가. 이는 선문답이 아니다. 국가의 근본은 곧 국민이고, 그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이를 망각한 권력자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한다. 그로 인한 참상(慘狀)은 우리가 목도하고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배신은 장군이 하셨소. 자식새끼 살리겠다고 가짜 왜구질까지 한 이 놈을 살리시면서 장군께서 뭐라 하셨소. 내 자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자식들 식구들 모두 살리며 속죄하라고 가별초에 남기셨소. 근데 이게 뭡니까. 여기 5만 명의 남의 집 자식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겐 10만 명의 어머니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전쟁 계속 하면 10만 부모에게서 5만 명의 자식을 빼앗고 그 피눈물을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결국 이성계는 왕명을 받들고 출정한다. 하지만 큰비로 인해 압록강은 범람하고, 5만 군사는 갈길을 잃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까지 창궐한다. 야박하게도 우왕과 최영은 압록강을 도하(渡河)하라고 다그친다. 눈앞의 군사들은 울부짖는다. “이 전쟁 계속 하면 10만 부모에게서 5만 명의 자식을 빼앗고 그 피눈물을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말머리를 돌리면 ‘역적(逆賊)’이 된다. 이성계의 가솔들은 연금되어 있다.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었던 그에게 더할나위 없이 어려운 고민이 시작된 것 것이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결정한다. “부인,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내 아이들, 미안하다. 난 이렇게 할 것이다. 나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이성계에서 태조 이성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가족’의 틀 안에 머물렀던 그가 새로운 ‘국가’를 여는 창업자가 된 것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있었고, 그 ‘한 사람’을 ‘목적’으로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이는 곧 ‘가족의 확장판’으로서의 국가였다. <육룡이 나르샤>는 최영의 국가와 이성계의 국가를 병치시키고, 그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이성계의 손을 들어준다. 역사 드라마는 ‘과거’를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길 욕망한다. <육룡이 나르샤>가 ‘위정자’를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국가’를 논하는 까닭은 지금 이 시대의 ‘위정자’와 ‘국가’를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퇴락의 길을 걸었던 고려 말기 위정자들의 부패와 탐욕, 그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국민’이 없고, 껍데기에 불과한 ‘국가’만 덩그러니 남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육룡이 나르샤>는 다시 한번 국가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한다. 어떤 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가.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다시한번 정도전의 국가론을 떠올려보자. “국가(國家)란 창으로 땅과 백성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족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국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