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책벌레 5인..정도전 세종대왕 이율곡 이덕무 유만주

 

조선의 책벌레 5인..정도전 세종대왕 이율곡 이덕무 유만주

 


 

‘책벌레’란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벌레라고 하니,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맘충’이니 ‘애비충’ 등
혐오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벌레 충(蟲)이 생각나지만, 같은
말이라 해도
책벌레라는 말은 그리
듣기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에는
조선시대의
책벌레들 22인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습니다.

 

이 중
정도전과 세종대왕, 율곡 이이, 이덕무, 유만주 등
조선의
책벌레 5인
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특히 율곡 이이에게 있어
책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였습니다.
애서가이자 다독가였고 박학한 지식인이자 교양인으로 책에 미친 이 책벌레들이 베풀어놓은 생각들은
조선사회를 만들었고, 결국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
정도전 – 혁명의 완성을 꿈꾸었던 정도전의
금속활자


조선의 책벌레 5인..정도전 세종대왕 이율곡 이덕무 유만주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에는 서문에 이어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는
시>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물어보자, 어떤 물건이 사람에게 지식을 더해줄까?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으면 문장을 통해 얻는 법,

한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적이 적어서 열 상자 책을 읽은 이 한 사람도 없다네.

(…)

간절히 바라노니 부디 서적포를 설치하여 후학에게 널리 읽게 하고 무궁토록 전했으면.”

 

서적포를 설치하고
서적을 많이 인쇄해서 보급할 수 있도록 가까운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예리한 안목의
정도전은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자고 제안했는데, 동활자란
금속활자를 말한다.
이 시를 쓸 무렵
정도전은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던 고려에서 불교를 제거하고 성리학을 설치할 것을 꿈꾸었다. 그 수단으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종수의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금속활자는 주로 불경을 인쇄하고 있었으니, 정도전은 적의 무기로 적을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금속활자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정도전을 죽인 태종 이방원은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고 세종은 그것을 계량하여 갑인자(甲寅字)를 제작해 막대한종수의 책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책으로 성리학에 의해 사고하는 사대부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조선을 5백년 동안 지배했다.
정도전 자신은 금속활자를 만들지 못했지만
그의 구상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혁명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도전이 생각했던 금속활자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2 세종 타고난 독서가


 

독서광이었던 세종은 여러 달 병을 앓는 중에도 책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즉위하고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수라를 들 때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놓았고, 한밤중까지 책에 빠져들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 태종이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도 아니고 임금이 되어 어찌 이토록 고생스럽게 책을 읽는단 말이냐”며 책읽기를 금했을 정도였지만 소용없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책을 읽는 바람에 세종은
눈에 병이 났고, 그 눈병은 당뇨병, 부종 등과 함께
말년의 세종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급기야 즉위 24년이 되던 해에는 눈병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눈병을
초래할 정도로 읽어댄 독서광 세종의 지식은 참으로 넓고 깊었다. 문학과 역사, 유학은 물론이고 언어학, 음학, 천문학, 농학, 기계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았고, 조선 후기가 되면 극소수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는 오직 중인들의 학문이 되었던 수학 역시 세종의 관심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중국어를 배우는 데도 열심이었으며,
신하가 읽는 중국어를 한 번
듣고 완전히 기억할 만큼 어학의 천재였다.

 

알다시피 조선의 문화란 모두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의 두뇌에서 나왔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다. 그 능력은 타고난 두뇌와 성실성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의 쉼없는 독서로 축적된 지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3 율곡 이이의 독서예찬


 

율곡에게 있어 독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율곡의 일과는 일과 독서로 이루어졌다.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옳고 그름을 분변하고, 그 분변은 일상의 일에서
실천돼야 한다. 율곡에게 있어 독서는 곧 인간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준거였다.

 

율곡은 소학과 사서오경을 인간이 읽어야 할 기본교과서로 들고 있다. 율곡은 성현의 책을 예로 든다. 먼저 소학을 읽어 부모, 형제, 임금, 어른, 스승, 벗과의 관계에서 윤리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방법과 힘을 얻는다. 다음에는 사서(四書) 중 대학을 읽어 궁리(窮理), 정심(正心),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도리를 알고 실천하고, 논어를 읽어 인(仁)에 대해 배우고, 맹자를 읽어 의(義)와
이(利)를 가리고,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공부를 하고, 중용을 읽어 성정(性情)의 덕과 천지만물의 원리를 음미하여 깨달음을 얻는다. 사서 다음에는 오경(五經)이다. 시경을 읽어 마음의 정(正)과 선을 칭찬하고 사(邪)와 악을 나무라는 도리에 대해 공부하고, 예기를 읽어 예(禮)의 절차와 정신에 대해 깨우치고, 서경을 읽어 유가 정치철학의 기원을 밝히고, 춘추를 읽어 역사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기를 것 등을
주문했다.

 

율곡시대의 독서는 양반만의 일이었다. 양반의 시대는 지나갔으니
율곡의 독서예찬이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율곡의 진지한 책읽기는 곱씹어봐야 한다.
인간에게 책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무다.
책읽기가 무너지면
사회의 교양층이 무너진다.

 

4 이덕무 책 읽는 바보


 

이덕무는 서파(庶派)였다. 그 자신이 서자는 아니었다. 그의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 서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은 서파가 된다. 조선시대에 서파라는 것은 관료로서의 출세길이 막히고,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덕무는 직업이 없었다. 농사꾼도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에 사는 그에겐 농토도 없었고, 또 있다 해도 약질이라 농사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맹자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지낼 뿐, 만약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고 했고, 중국 전한 때 학자이자 문인인 양웅은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비록 걱정거리가 없다 한들 금수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덕무는 맹자의 ‘가르침’과 양웅의 ‘배움’이 바로 독서라고 말한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귀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덕무에게 독서는 곧 인간이 되는 길이다.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간서치, 곧 책 읽는 바보’라고 불렀다.

 

글을 막 배웠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그는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지내는 방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모두 창이 있어서 동쪽 서쪽으로 해가 옮겨가면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했다. 그는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 같았다. 그런 심오한 뜻을 깨치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이렇듯 책탐에 빠진 이덕무는 그 욕심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책을 수백 권 좌우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읽다가 읽을거리가 없으면 장부나 달력이라도
뒤적이며
읽는 것으로
그 탐욕을 치료했다.

 

5 유만주 한 젊은 지식인의 광적인 독서체험


 

유만주의 집안은 알아주는 명문이었으니 그가 원한다면 과거에 합격해 온갖 영화를 누릴 만도 한데,
과거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따라서 벼슬도 전혀 하지 않았다.
유만주의 아버지는 저암 유한준이다. 유한준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나”는 문장의 작자다.
유만주는 1775년(영조 51)부터 1785년(정조 9)까지의 일기인
[흠영]이란 책을 하나 남겼을 뿐이다.
그의 일생 소업은 오직 책읽기로 그는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다.

 

유만주는 “1765년(유만주 11세)부터 1780년까지 읽은 책이 아직 1천 권이 안 되니 박식하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고 스스로 탄식할 정도였다.
몹시 아플 때나 일이 있어 외출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순간도 책을 놓은 적이 없을 만큼
책을 좋아했고, 그가 읽은
책은 경전과 역사책은 물론 제자백가의 기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 지리서, 패관잡설, 온 세상 구석구석의 숨어 있는 괴이한 일들에 대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5천 권이 넘었다고 한다.

 

유만주는
자신이 읽은 책을 흠영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새로 읽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책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책을 어디서 구했는지, 어떤 책이 읽고 싶은지, 또 그날그날 읽은 책과 읽은 면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책의 중요내용을 요약하거나 옮겨쓰기도 하고 거기에 비평을 하기도 했다.
단 한 권 남긴
흠영이 중요한 것은 유만주의 방대한 독서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상, 조선의 책벌레 5인..정도전 세종대왕 이율곡 이덕무 유만주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