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정도전 민본정치를 꿈꾼 진보적 개혁가

 

육룡이 나르샤 정도전 민본정치를 꿈꾼
진보적 개혁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천호진), 삼봉
정도전(김명민) 6명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그려나가고
있는
팩션사극입니다. [육룡이
나르샤] 지난회에서는
고려말
세도를
떨쳤던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맞선
죄로
유배를
떠났다가
돌아온
정도전
이성계를
신조선의
왕으로
추대하는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고려말
조선초
10여
년간을
이끈
개혁의
주체로서, 또
조선
건국의
이념을
제공한
이론가로서
개국공신

첫손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고려말
변방의
무장이었던
이성계에게
야심과
비전을
불어넣고
혁명에
끌어들여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조선왕조의
초석을
쌓은
경세가이자
사상가였던
그는
학문, 문장, 병법, 정치감각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책략에도
능한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을
세운
핵심
브레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건국
후에는
법제를
확립하고
천도를
단행케
했으며
개국
이념인
성리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이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역량을
펼쳐보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놀라운 인물 정도전 역을 명품배우
김명민이 맡고 있는데, 실제 정도전의 모습과 흡사한 느낌을 주기도 하거니와
카리스마 넘치는 형형한 눈빛은 누구라도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촬영을 하면서
10여 페이지가 넘는
대본을
NG 한 번
없이 해내는 그의 신들린 연기는
감탄 그 자체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조선 건국 스토리의
시작을
앞두고
민본정치를 꿈꾼 진보적 개혁가 정도전
대해
최용범의 [하룻밤 안에 읽는 고려사]와 EBS [역사저널
그날 정도전을 말하다]를 바탕으로
좀더 상세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도전
민본정치를 실현시키려 했던 진보적 개혁가

 


정도전 영정

 

역성혁명을 실천했던 풍운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개혁을 꿈꾸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명망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달리
보잘것없는 집안이었다.
고조부 정공미(鄭公美)는 고을의 아전격인 호장이었으며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 오다가 아버지 정윤경(鄭云敬)에 이르러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기에
이런 출신 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받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외톨이
생활은
그로 하려금 역성혁명을 꿈꾸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에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정몽주
등과 교분을 맺었다. 24세인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를 통과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역임했으며,
그 후 성균관 박사로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으며 1371년에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어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정도전의 유배시절

 


 

1375년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발한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 소재동으로 유배를 떠난다. 그곳에서 정도전이 목격한 것은 백성들의 비참한 삶이었다. 부곡(部曲)이란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있었던 지방의 특수행정구역으로 노비, 천민 등 농민들보다 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모여살던 촌락을 말한다. 이런 곳에서 정도전은 백성들과 어울려 살았다. 유배 중에도 혁명을 꿈꾸었던 정도전은 이 3년 동안
더없이 어렵게 사는 백성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세월로 만들었다.

 

부곡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정도전은
백성들이 결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 동안 무슨 정치를 하려 했던가” 하는 생각을 새롭게 하는 등 3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정도전의 [답전부(答田父)]는
이 시기에
농부들과
주고받은 문답을 통해 백성들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깨달은 내용을 기록한 서적이다.
이처럼 유배를 떠났던
사람들은
많았지민 정도전은 그들과 달랐다.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던 백성들에게서 오히려 삶의 지혜를 배우고
지배층의 정치와 민중의 삶의 괴리를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민본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굳게 했던
것이다.

 


정도전의 유배시절

 


 

3년 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의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생활을 하던 그는
1383년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킨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성계를 찾아간다. 당시
이성계는 고려 변방 동북면의 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듬해 정도전은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젊은시절
정도전의 가까운 벗이자 열렬한 개혁파의 동지였던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그해
7월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한다.

 


정도전의 염원이었던 조선 개국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이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습장이었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의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했으며,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확립시켰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사회 속에 실행했고, 병권집중화 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왕조가
들어선
7
동안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이러한
노력은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동원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한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세자 방석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의 업적

 


 

정도전은
먼저
국가이념을
정립하고
중앙집권제와
왕도정치

민본주의를
통치철학의
기초로
삼았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
교학(敎學)으로
내세웠으며
나라의
근본과
통치체제를
정비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펴냈다. 그리고
중농주의에
바탕을
두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나라의
공전(公田)
균전(均田)
늘렸는데,
이것은
경제적
기득권을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나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소유할

있게

것이었다.

 

또한
정도전은
한양
천도와
함께
조선의
본궁인
경복궁
건설에
참여해

이름을
지었으며,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숭례문, 흥인문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
분할도
손수
결정했다. 이씨
왕조를
반석
위에
놓고
왕실을
오래
유지하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그는
명나라에
가서
이씨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왕조의
왕통
등을
알리는
외교를
직접
담당하고, 전국을
돌며
지방의
구획과
성보(城堡)
수축을
지정하거나
독려했다.
몸이
비대한
그는
각기병을
앓고
있었는데, 각기병은
무력증을
동반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력해
보이는
모습은커녕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한편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건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왕조를
섬긴
변절자
또는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
태종
이방원의
권력
집착에서
빚어진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기
위해
조선왕조가
의도적으로
매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가들도
있다.